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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6. 6世 〉7. <부정공>참의공휘사문묘갈명(參議公諱斯文墓碣銘)
1. 문헌 목록 〉6. 6世 〉9. <부정공>참의공겸천서원추배향사장관답통문(參議公謙川書院追配享四掌管答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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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참의공휘사문겸천서원추배향통문(參議公諱斯文謙川書院追配享通文)
參議公諱斯文謙川書院追配享通文 右敬吿事하나이다伏以忠孝는人倫之大本也니非忠이면國何以保며非孝면家何以安이리요故로左昔明王의治化布化는尤先於此道而克立則國家何患乎不保安也리오就白本順天市住巖面竹林里에故有一忠孝人하니姓은趙요貫은玉川諱斯文字道宗號三省으로朝鮮端宗世祖時人也라公은高麗大將軍門下侍中諱璋之五代孫이요壁上功臣玉川府院君諱佺之曾孫이요門下侍中兼典工判書玉川府院君諱元吉之孫이요典農副正諱瑜之子也라早年通朝하여官至修義副尉左軍司正이나當端宗遜位하여與弟節愍公諱崇文으로連結死六臣等諸公하여謀復上王이라가俄而요弟氏謂兄曰事未可知脱이니有不如意하여吾兄弟一時受禍則奈吾家奉祀何오我는既決以 殉義하니兄은其脱身歸家하여養親守廟가何如오公是其言하여遂棄官歸家하시다未幾에諸公謀復事脱露하여凡與其謀者는駢首就戮하여無一之或漏하니公은雖退在鄉里而與謀事發覺하여遂被拘至全州之俗稱馬近大尾之山하여受禍하시다時에中外戒嚴하여尸亦不能收하니家人이以遺衣로招魂하여葬于故山하니於玆에將五百年이러라本市에故有謙川書院하여奉安莊陵節臣諸公而公弟節愍公亦與其中이나獨公은寥寥數百載하여不稱於鄉邦하고亦不克躋於享祀之位하니豈不誠冤抑哉아況公의四子異日濟濟登宦하고家聲以昌하여又得追贈公通政大夫吏曹參議兼經筵參贊官則天爵人爵이固無所嫌於追配矣라公之事跡이雖不詳於傳記而其與於謀復故主는卽忠也오爲養親奉祀而免官還家는即孝也며終殉於義則節亦嵬焉이라嗚呼라事有奇偶하고跡有顯晦하니公의忠孝節義는豈非所當崇奉腏食하여以矜式於來後者乎아鄙等이忝在同鄉하면서稔聞公의懿蹟이라故로今春謙川書院享祀之日에公議大發하고衆見이歸一하여咸以追躋公於本院爲宜라顧事體重大하여不敢擅便하여玆以取決於泮館儒林大宗之地하나이다伏望僉尊께서는另賜鑑諒하시어特垂贊意하고以重斯事하여以致其決之地를千萬之望하나이다孔聖誕降二千五百四十七年(西紀一九九六年丙子)六月 日 全南鄉校財團理事長 李泳福 印 참의공휘사문겸천서원추배향통문(參議公諱斯文謙川書院追配享通文) 알립니다. 삼가 충효는 인륜의 큰 근본이니 나라에 충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겠으며 효도를 하지 않으면 집안이 어떻게 편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옛 날에 밝은 임금님께서는 정치를 하시고 교화를 펴시면서 이를 제일 먼저 하셨습니다. 이 도리가 제대로 되면 나라가 보존되지 못할까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삼가 아뢰올 말씀은 우리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 옛날 한 분의 충효한 어른이 계셨으니 성은 趙씨요 본관은 玉川 휘는 斯文 자는 道宗 호는 三省이신데 조선 端宗 世祖 때 어른이십니다. 공께서는 고려대장군 문하시중 휘 璋의 五대손이시며 벽상공신 옥천부원군 휘 佺의 증손이시며 문하시중 겸전공판서 옥천부원군 휘 元吉의 손자이시며 전농부정 휘 瑜의 아들이십니다. 젊은 나이에 벼슬을 하시어 벼슬이 수의부위 좌군사정에 이르셨는데 단종께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실 때를 당하여 동생 절민공 휘 崇文과 함께 사육신 등 여러분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동생이 형에게 말하기를 「일이란 알 수가 없으니 만약 여의치 못하여 우리 형제가 한꺼번에 화를 당하게 되면 우리 집의 양친봉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이미 의로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으니 형께서는 집으로 돌아가시어 부모님을 모시면서 사당을 지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시었습니다. 공께서는 그 말대로 하기로 하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시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에 여러분들의 상왕복위운동이 탈로 나서 그 모의에 참여한 자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해 한사람도 빠진 자가 없었는데 공은 비록 고향에 물러나 계셨지만 모의에 참여한 사실이 발각되어 마침내 전주땅 속칭 마근대미란산에서 화를 당하고 마셨는데 이때 안팎의 계엄이 삼엄하여 시 신 역시 거두지 못하고 집안사람이 남긴 옷으로써 초혼하여 선영에 장사지내신 지 어느덧 오백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을에 겸천서원이 있어서 장능의 여러 절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절민공 역시 거기에 드셨으나 유독 공만이 수백 년 동안 적적하게 향리에서 일컬어지지 못하고 제향조차 받지 못하시니 이 얼마나 억울하시겠습니까? 더군다나 공의 네 아드님은 후에 벼슬길에 나가서 집안의 명성을 떨치셨고 또 그 덕에 공을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하였으니 관직이나 인품이 배향하는데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공의 사적이 전기에 자세히 나타난 것은 없으나 그 분이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도모한 것은 충이요 양친과 집안제사를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신 것은 孝며 마침내는 절의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니 이 얼마나 훌륭하십니까? 일에는 기우가 있고 행적은 현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과 같은 충효와 절의는 마땅히 높이 받들어 제향하여 후세의 모범을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같은 고을에 살면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금년 봄 겸천서원의 제사때 공론이 크게 일어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어 공을 겸천서원 에 추가로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이 일의 사체가 중대하여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기에 성균관과 유림의 결정을 바라오니 여러 어른들께서는 특별히 양해하시고 찬동하시어, 이 일을 중하게 여기시어 결정되도록 해주시면 천만 다행하겠습니다. 공자탄생 이천오백사십칠년(서기一九九六년 병자) 유월 일 전남향교 재단이사장 이영복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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